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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시그나기: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언덕 위 마을에서의 7일

by baebeenew 2025. 5. 31.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조지아의 와인 마을에서의 느림의 미학

오늘은 낯선 나라의 소도시 생활 체험기에 대한 주제로 조지아 시그나기 마을에서의 7일 에세이를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조지아 시그나기: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언덕 위 마을에서의 7일
조지아 시그나기: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언덕 위 마을에서의 7일

바람이 먼저 말을 거는 마을


조지아 동부, 카헤티 지역의 한 언덕 위에 작은 마을 시그나기가 있다. 수도 트빌리시에서 차로 약 두 시간이면 닿는 거리지만, 도착한 순간 시간의 감각이 흐릿해졌다. 고즈넉한 붉은 지붕들과 돌로 쌓은 성벽, 그리고 마을을 부드럽게 감싸 안은 햇살. 모든 것이 “서두를 필요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시그나기는 ‘사랑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고 있지만, 로맨틱한 연인보다는 고요를 사랑하는 이방인에게 더 적절한 곳일지도 모른다. 아침이면 제일 먼저 바람이 인사를 건넨다. 유리창을 살짝 흔들고, 발끝을 스치고, 와인 포도밭 사이를 천천히 지나간다. 그런 바람 속을 따라 마을 골목을 걷다 보면, 아주 오래된 집 앞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는 노인을 만난다. 우리는 서로 언어가 다르지만, 그 미소 하나면 모든 말이 충분했다.

숙소는 한 가정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낡았지만 정갈했고, 침대 옆엔 손으로 짠 듯한 자수가 놓여 있었다. 아침 식사로는 갓 구운 빵과 꿀, 치즈, 그리고 수제 복숭아 잼이 나왔다. 맛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것이 ‘누군가의 손에서 온기와 시간을 들여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종종 그런 것을 잊고 산다.

 

와인에 담긴 땅의 기억


카헤티는 조지아의 와인 산지다. 무려 8000년 전부터 와인을 만들었다는 이 나라 사람들은, 와인을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땅과 조상의 숨결로 여긴다. 시그나기 인근의 한 가족 와이너리에서는 전통 방식인 ‘크베브리’(qvevri) 와인 양조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크베브리는 땅 속에 묻은 거대한 항아리인데, 포도즙을 씨와 껍질째 넣고 몇 달 간 자연 발효를 시킨다.

가족들은 내게 잔을 건넸다. 잔은 유리컵이 아니라 도자기로 된 작은 그릇이었고, 마시는 방식도 우리와 조금 달랐다. 건배를 할 땐 “가마르조스(건배)” 대신 “가카흐티스 고지”(카헤티의 건강을 위해)를 외쳤다. 한 모금 마시자, 깊고 탁한 맛이 입 안을 감쌌다. 와인의 첫맛보다, 그 뒤에 밀려오는 감정이 더 기억에 남는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오래된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와인 가족의 할머니는 손님이 오면 늘 같은 노래를 부르신다고 했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노래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 깊은 곳을 울렸다. 외국 땅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말과 음률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마 그것은 와인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느림의 미학, 잊고 있던 삶의 속도


일주일 동안 나는 아무 계획 없이 시그나기의 하루하루를 살았다. 시장에 가서 천천히 토마토를 고르고, 길고양이에게 말을 걸고, 언덕에 앉아 구름이 지나가는 속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다 흘렀다. 인터넷은 느렸고, 전화 신호도 자주 끊겼지만, 그 모든 불편함이 곧 평화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카페에서는 매일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현악기 선율. 그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거나, 그냥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그 카페의 주인은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종종 우리 도시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요. 하지만 그 아무것도 없는 게 때론 가장 중요한 걸 가져다줄 수 있어요.”
그 말은 시그나기라는 마을 전체를 설명하는 말 같았다.

떠나는 날, 마을 사람 몇 명이 내가 탄 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특별한 인연도 없었고, 많은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그 짧은 인사 속에 담긴 따뜻함은 오래도록 남았다. 도시로 돌아온 후에도 나는 자꾸만 그 느린 시간과 바람의 온도를 떠올리게 된다.

시그나기는 유명 관광지도, 눈부신 랜드마크도 없지만 ‘삶의 속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일주일은 마치 내 안의 시계를 조용히 다시 맞추는 시간이었고, 그 느린 시간 속에서야 비로소 나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